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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과 마산의 분노, 부마항쟁이 민주화에 끼친 영향은? :한국
memoguri8
2025. 5. 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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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거리로 나온 민심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다
1979년 10월, 대한민국 남쪽의 두 도시 부산과 마산이 들끓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부마항쟁)**은, 당시 강력한 독재정권 아래에서 유일하게 자발적 시민 참여로 확산된 대규모 시위였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항쟁은 단순한 지역 시위를 넘어 박정희 정권 붕괴를 앞당기고, 한국 민주화운동의 물꼬를 튼 결정적 사건으로 평가받습니다.
1. 부마항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들이 유신체제 철폐를 외치며 교정 밖으로 나섰습니다.
- 이 시위를 시작으로 하루 만에 부산 시내 전역에 항쟁이 확산, 약 5만 명 이상 시민과 학생들이 함께하게 됩니다.
- 10월 18일에는 마산(현 창원시)으로도 불붙으며, 경남대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서 정부의 독재, 물가 폭등, 언론 통제 등에 항의했습니다.
- 이처럼 학생 시위 → 시민 연대 → 도시 전체로 확산된 민주항쟁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규모였습니다.
2. 왜 하필 부산과 마산이었을까?
- 두 도시는 박정희 산업화의 핵심 거점이자, 동시에 정권의 불균형 혜택에서 소외된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 노동자, 중산층, 서민 모두가 물가 상승과 임금 억제 정책에 시달리며 불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 특히 부산은 언론 검열, 유신 헌법, 긴급조치 9호로 민주주의가 짓밟힌 상황에 강한 반감을 가진 학생운동의 중심지였습니다.
- 마산은 이미 1960년 3·15 부정선거 항거의 역사를 지닌 지역으로, 저항의식이 강한 시민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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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신체제, 부마항쟁의 분노를 부른 뿌리
- 1972년,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통해 종신집권을 가능케 하고, 국회를 해산, 긴급조치 발동권까지 가지게 됩니다.
- 이로 인해 언론과 국회, 사법부까지 사실상 대통령 직속이 되었고, 국민의 정치 참여는 완전히 막혀버렸습니다.
- 부마항쟁은 이러한 유신 독재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민중의 실질적 저항이었으며, 박정희 정권의 내부 균열을 현실로 만든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4. 정권은 어떻게 대응했는가?
- 박정희 정부는 계엄령 수준의 대응으로 부산·마산에 군 병력과 특수부대까지 투입했습니다.
- 시위대는 강경 진압으로 수백 명이 연행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으며, 일부는 군대의 총구 앞에 서야 했습니다.
- 특히 부산에서는 YH무역 사건과 김영삼 의원 제명 사태에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가 불타오르며, 정부는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 이 무렵, 박정희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갈등도 극대화되었고, 결국 **10·26 사태(박정희 피살)**로 이어지게 됩니다.
5. 부마항쟁이 우리 민주주의에 남긴 유산
- 부마항쟁은 비록 군에 의해 강제 진압되었지만, 박정희 정권 붕괴에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 이후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으로 평가받습니다.
- 이 항쟁을 통해 “민중의 저항은 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신념이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 2019년, 부마항쟁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며, 그 역사적 의미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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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리는 왜 부마항쟁을 기억해야 할까?
- 부마항쟁은 지역의 저항이 어떻게 전국적 민주화로 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입니다.
- 이름 없는 수많은 시민들과 대학생들이 자신의 안위를 뒤로한 채 정의와 자유를 외쳐 일어선 역사입니다.
- 이 항쟁은 “우리가 먼저 움직였고, 역사가 따라왔다”는 시민 주체 민주주의의 상징입니다.
- 단기간의 사건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파장은 지금의 자유와 권리에 직결된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 그래서 우리는 부마항쟁을 단지 과거로만 기억하지 말고, 현재의 민주주의에 묻어 있는 ‘그날의 목소리’로 들어야 합니다.
7. 거리로 나선 사람들, ‘학생’에서 ‘시민’으로
- 부마항쟁의 시작은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결기 있는 외침이었습니다.
- 1979년 10월 16일, 약 200명의 학생이 “유신철폐, 언론자유, 독재타도”를 외치며 시내로 진출했고, 순식간에 수천 명으로 번졌습니다.
- 이날 밤, 부산역 광장에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들었고, 버스 기사, 상인, 직장인, 고등학생까지 합류하며 항쟁은 대중적 물결로 변했습니다.
- 이틀 뒤 마산에서도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봉기, 같은 방식으로 주민들과의 자발적 연대로 확산되었습니다.
- 이는 단순한 ‘학생운동’을 넘어선 전 사회적 저항 운동이었고, “우리는 국민이다”라는 민주 시민의 자각이 폭발한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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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언론은 침묵했고, 진실은 봉인됐다
- 당시 언론은 유신체제 하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부마항쟁에 대해 거의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 일부 신문은 “불순분자 선동”, “일부 과격 학생의 불법 시위”로 왜곡했고, 시민 참여나 정부의 강경 진압은 철저히 감췄습니다.
- TV 뉴스에는 단 1초도 나오지 않았고, 국민의 90%는 당시 이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 진실은 몇몇 해외 언론 보도와 유학생들, 그리고 입소문을 통해 극히 제한적으로 전해졌을 뿐입니다.
- 부마항쟁은 이처럼 기억 속에서 의도적으로 지워진 민주화 운동이었고, 피해자와 참여자들도 수십 년간 침묵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9. 그날, 시위대 안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
- “학생들이 맨 앞에서 외치고, 우리 어른들이 뒤따랐어요. 무섭지만 그냥 집에 있을 수는 없었죠.”
- “군인이 총을 들고 우리를 향해 뛰어오는데,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어요. 그 순간, 내가 사람답게 사는 게 뭔지 알았어요.”
- “잡혀가고 맞아도, 우리 마을 사람들은 밤에 밥 챙겨주고 옷 갖다 주며 도왔어요. 그게 연대였죠.”
- 실제 부마항쟁 참여자들은 ‘두려움보다 분노가 컸던 날’, **‘정의감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고 회고합니다.
-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이후 긴 탄압과 침묵의 시간을 견뎌야 했지만, 오늘날 다시 그날을 떠올리며 자긍심과 책임감을 함께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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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부마항쟁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이유
- 10·26 사태 직후 정국이 급변하며, 부마항쟁은 ‘박정희 피살의 전조’로만 다뤄졌습니다.
- 이후 5·18 광주항쟁, 6월 항쟁 등 보다 큰 규모의 민주화 운동들이 이어지면서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낮아졌습니다.
- 또한 많은 참여자들이 지역 차별, 정치적 탄압, 신분 불이익 등을 우려해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야 했습니다.
- 2000년대 중반까지도 부마항쟁을 명확히 다룬 교과서, 다큐, 기념공간조차 부족했을 정도입니다.
- 그러나 최근, 지역 사회와 유족, 연구자들의 노력, 그리고 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 정책에 따라 부마항쟁의 재조명이 본격화되고 있습니다.
11. 부마항쟁의 기억을 이어가는 움직임들
- 2019년 부마민주항쟁 국가기념일 제정
→ 매년 10월 16일, 부산·창원에서 공식 행사 개최 - 부산대학교와 경남대학교, 시민단체 주도의 역사교육 프로그램 활성화
- 부마민주항쟁기념관 건립 추진: 마산과 부산 두 지역 모두에 메모리얼 공간 조성 중
- 생존자 구술 프로젝트: 1979년의 기록을 말과 글로 남기는 작업 지속
- 고등학교 교과과정 개편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부마항쟁의 의미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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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민주주의는 멀리 있지 않았다’ — 부마항쟁의 교훈
- 부마항쟁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자유와 권리를 누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누구의 외침에서 시작되었는가?” - 오늘날 누리는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투표의 권리는 모두 그날 거리로 나섰던 이들의 발걸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역사는 기억할 때 비로소 현재를 움직이고, 미래를 지킬 힘이 됩니다.
- 부산과 마산의 분노는 단지 분노로 끝나지 않았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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