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유산인가, 문명의 전리품인가: 발굴 허가증이 바꾼 인류의 역사
19세기 초, 이집트의 뜨거운 사막은 단순한 모래바람이 부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오스만 제국의 야심가 무함마드 알리(알리 파샤)의 통치 아래 근대화를 꿈꾸는 전장이자, 영국과 프랑스라는 두 거인이 인류의 기원을 선점하기 위해 벌인 소리 없는 전쟁터였습니다. 오늘날 대영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을 가득 채운 화려한 고대 이집트의 유물들, 그 이면에는 '발굴 허가증(Firman)'이라는 이름의 종이 한 장과 이를 얻기 위한 치열한 외교적 수싸움, 그리고 한 시대의 격변기가 숨어 있습니다.

[서론: 나폴레옹이 깨운 거인, 이집트]
모든 사건의 시작은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집트 원정이었습니다. 비록 군사적으로는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가로막혀 실패로 끝났지만, 나폴레옹이 동행시킨 수백 명의 학자들은 '이집트지(Description de l'Égypte)'를 편찬하며 유럽 전역에 '이집트 광풍(Egyptomania)'을 일으켰습니다.
유럽인들에게 고대 이집트는 성서의 배경이자 신비로운 지혜의 원천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고, 실질적인 지배권은 알바니아 출신의 용병 대장에서 이집트의 통치자로 거듭난 무함마드 알리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서구의 기술을 받아들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싶어 했고, 유럽의 열강들은 이집트의 고대 유물을 원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문화재 이동'이 시작됩니다.
[본론: 유물 발굴의 시대적 배경과 전개]
1. 무함마드 알리 파샤의 실리 외교
무함마드 알리는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스만 조정으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지지가 절실했습니다. 그에게 피라미드 아래 묻힌 석상과 파피루스는 조상의 신성한 유산이라기보다는, 유럽의 환심을 사고 근대화에 필요한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외교적 화폐'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영국 영사 헨리 솔트(Henry Salt)와 프랑스 영사 베르나르디노 드로베티(Bernardino Drovetti)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했습니다. 그들에게 특정 지역의 발굴권을 부여하는 '피르만(Firman, 오스만 제국의 칙령)'을 발행해 줌으로써, 유럽 열강의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2. 영국과 프랑스의 '유물 확보' 경쟁
이 시기 유물 발굴은 오늘날의 정교한 고고학적 조사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보물 찾기'이자 '약탈'에 가까운 경쟁이었습니다.
- 영국의 헨리 솔트와 벨조니: 전직 서커스단 괴력사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벨조니는 영국 영사 솔트의 사주를 받아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을 옮기는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가 옮긴 수많은 유물은 대영박물관의 핵심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 프랑스의 드로베티: 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스 외교관 드로베티는 무함마드 알리와의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엄청난 양의 유물을 수집했습니다. 그의 수집품은 이후 루브르 박물관과 이탈리아 토리노 이집트 박물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발굴 허가증을 무기 삼아 서로의 발굴 현장을 방해하거나, 더 가치 있는 유물을 차지하기 위해 현지인들을 매수하고 무력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3. 발굴 허가증(Firman)의 의미와 한계
'피르만'은 본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나 총독이 내리는 공식 명령서입니다. 하지만 19세기 이집트에서 이것은 곧 '소유권'을 의미했습니다. 유럽의 탐험가들은 이 종이 한 장을 들고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 고분과 신전을 파헤쳤습니다. 당시의 허가증은 유물의 국외 반출에 대해 매우 관대했거나, 혹은 무함마드 알리가 의도적으로 묵인한 측면이 큽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유물이 훼손되었고, 맥락(Context)을 상실한 채 유럽의 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시기에 발견된 '로제타석'과 같은 유물들은 샹폴리옹에 의해 상형문자가 해독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어, 잊혔던 3,000년 이집트 역사를 인류에게 되찾아 주기도 했습니다.
4. 유물 발굴에서 고고학으로의 전환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무차별적인 반출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무함마드 알리의 후계자들은 이집트의 자산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프랑스 학자 오귀스트 마리에트는 이집트 최초의 유물 보존 기구를 설립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의 전신입니다. 발굴 허가증은 점차 '가져가기 위한 권리'에서 '보존하고 기록하기 위한 책임'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핵심 Q&A 5가지]
Q1. 무함마드 알리는 왜 귀중한 이집트 유물을 외국에 쉽게 넘겨주었나요? A1. 그는 이집트의 근대화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적,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습니다. 그에게 고대 유물은 서구 열강과의 우호 관계를 다지기 위한 전략적 '선물'이자 외교적 수단이었습니다.
Q2. 당시 발굴 허가증(Firman)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나요? A2. 초기 허가증은 특정 지역에서의 발굴 권한과 유물의 소유권을 포괄적으로 허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중복되는 유물이나 파손된 것은 가져가도 좋다"는 식의 모호한 규정을 악용해 대량의 유물이 반출되었습니다.
Q3. 영국과 프랑스의 유물 경쟁에서 가장 유명한 유물은 무엇인가요? A3. 단연 '로제타석'입니다. 본래 프랑스군이 발견했으나 영국의 승리로 인해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고,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밖에도 람세스 2세 흉상 등이 주요 쟁탈 대상이었습니다.
Q4. 이 시기의 발굴 방식은 오늘날과 어떻게 달랐나요? A4. 당시엔 유물의 위치나 층위(Stratigraphy)를 기록하는 과학적 방법론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로지 화려하고 거대한 유물을 온전하게(혹은 조각내어) 옮기는 것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고고학적 정보의 손실이 막대했습니다.
Q5. 발굴 허가증을 통해 반출된 유물들은 현재 반환이 가능한가요? A5. 매우 복잡한 문제입니다. 이집트 정부는 당시의 허가증이 강압에 의한 것이거나 불법적인 요소가 있었다며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당시의 법적 절차(피르만)를 거친 정당한 취득임을 주장하며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결론: 흙먼지 속에 남겨진 교훈]
무함마드 알리 시대의 유물 발굴 허가증은 제국주의의 산물이자, 문명 간의 거대한 충돌과 융합의 증거입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가져간 수많은 보물은 유럽의 박물관에서 전 세계인들에게 이집트의 위대함을 알리는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이집트인들에게는 뼈아픈 수탈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역사를 통해 유물이란 단순히 과거의 물건이 아니라, 한 민족의 정체성이자 인류 공동의 자산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반환 논쟁은 200년 전 그 허가증이 남긴 숙제입니다.
[참고출처]
- 에드워드 사이드 저, 『오리엔탈리즘』 - 서구 열강이 동양을 바라보는 시각과 유물 수집의 이데올로기적 배경.
- 브라이언 페이건 저, 『고고학의 역사』 - 초기 이집트 발굴 현장의 혼란과 벨조니 등의 활동 기록.
- 자히 하와스 저, 『이집트의 보물』 - 이집트 유물의 반출 역사와 현대적 보존 노력에 대한 전문가의 시각.
- 유네스코(UNESCO) 문화유산 보고서 - 19세기 유물 반출의 법적 쟁점과 '피르만'의 효력 분석.
- 영국박물관(The British Museum) 공식 아카이브 - 헨리 솔트와 무함마드 알리 사이의 서신 및 발굴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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